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오트빌 왕조의 단절 ==== '''[[탕크레드]]'''는 즉위 직후부터 반란에 시달렸다. 1190년 1월, 팔레르모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이 희생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탕크레드는 이를 수습하느라 1190년 말까지 시칠리아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다. 1190년 3월,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아풀리아 및 캄파니아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탕크레드를 몰아내기 위해 하인리히 5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1190년 5월 칸덴의 하인리히 휘하 제국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무슬림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빴던 탕크레드는 아세라 백작 리샤르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리샤르는 상당한 용병을 모집한 뒤 제국군과 반란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세를 개시해 1190년 9월 반란군을 섬멸하고 제국군을 쫓아냈다.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는 토벌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1190년 9월 14일과 9월 23일,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메시나에 상륙했다. 이보다 앞서, 굴리에모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두 왕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고 지원군과 보급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 2세는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단행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두 왕은 이 제안을 이용해 시칠리아에 찾아왔다. 문제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1세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탕크레드는 굴리에모 2세의 왕비이자 리처드 1세의 아버지 [[헨리 2세]]의 딸이었던 조안나를 억류하고 그녀의 재산을 압류했으며, 결혼을 통해 그녀에게 이전되었던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에 상륙한 뒤 조안나를 석방하고 그녀가 겪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잉글랜드군과 대결할 이유는 없었기에, 탕크레드는 리처드 1세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굴리에모 2세가 십자군을 위해 완전히 장비된 선박을 포함한 전쟁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이를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탕크레드가 이에 난색을 표하자, 리처드 1세는 1190년 9월 30일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의 바나라 시를 점령하고 조안나를 영국 수비대의 보호 아래 그 곳에 두었다. 이후 메시나로 돌아온 잉글랜드군은 그리스 수도원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도자들을 몰아냈다. 1190년 10월 3일, 영국인들의 행동에 분노한 메시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그들을 수도원에 봉쇄했다. 필리프 2세가 양자를 중재하려 했지만, 리처드 1세는 협상 대신 무력 행사를 택하기로 하고 메시나로 진군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새로운 반 영국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인질을 요구했고, 메시나 성벽 인근 언덕에 마테그리폰(Матегрифон: 그리스인을 위한 굴레) 요새를 세웠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이같은 행동에 분개했고, 카타니아에 있던 탕크레드에게 "당신이 영국인들을 대적하려 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적인 [[벨프 가문]]을 지원하는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보다 시칠리아에게 더 선호되는 잠재적 동맹이었다. 탕크레드는 이 점을 고려해 리처드 1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1190년 11월 11일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탕크레드는 조안나에게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넘겼고, 굴리에모 2세가 약속했다는 군수 물자을 모아서 리처드 1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는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했다. 리처드 1세는 그 대가로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탕크레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메시나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상, 마테그리폰 요새 해체를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을 시칠리아에서 얼른 내보내고 싶었던 탕크레드는 1191년 3월 리처드 1세에게 지난날 필리프 2세가 보냈던 밀서를 보여줬다. 이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한바탕 다퉜고, 곧 시칠리아를 떠나 동방으로 얼른 가기로 합의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1191년 3월 30일과 4월 10일에 각각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이끌고 메시나에서 출항했다. 1191년 1월, 하인리히 6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롬바르드 연맹과 피사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4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로마에 입성했다.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던 클레멘스 3세는 제국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뒤이어 새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3세]]는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는 새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즉위식을 치렀다. 이후 하인리히 6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베르사, 카푸아, 타란토, 몬테 카시노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살레르노 주민들은 아예 제국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쿠스탄차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도록 초대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공세는 나폴리 성벽에서 저지되었다. 아크라 백작 리샤르는 제국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지만, 살레르노 대주교 니폴라 데 아겔로가 수비를 이끌어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여기에 해상에서는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가 제국군을 지원하던 피사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성전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군영에서 전염병이 나돌면서 많은 제국 병사들이 죽어갔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8월 24일 나폴리 포위를 해제하고 독일로 철수헀다. 그는 이전에 점령한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쿠스탄차는 살레르노에 남아서 자신과 남편의 시칠리아 왕관에 대한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6세의 제국군이 독일로 철수하자, 그 때까지 쿠스탄차를 극진히 모시던 살레르노 주민들은 태도를 싹 바꿔 쿠스탄차를 붙잡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살레르노에 찾아온 탕크레드의 조카가 이를 막고 쿠스탄차를 메시나로 이송했다. 메시나에서 쿠스탄차와 대면한 탕크레드는 외국군을 끌여들어 조국을 위태롭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 이에 쿠스탄차는 탕크레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탕크레드는 쿠스탄차를 팔레르모에 유폐시킨 뒤 하인리히 6세가 남겨둔 수비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북부 캄파니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쿠스탄차는 팔레르모에 이송된 뒤 탕크레드의 왕비 시빌라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시빌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자야 했으며, 궁궐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자, 시빌라는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탕크레드는 마테오 데 아젤로의 제안에 따라 쿠스탄차를 나폴리로 이송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했다. 1192년 6월, 첼레스티노 3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가 그라비나스에서 탕크레드와 만났다. 하인리히 6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전임 교황 클레멘스 3세와 마찬가지로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탕크레드는 그 대가로 루지에로 1세 시대부터 시칠리아 왕이 누려왔던 권한인 "교황의 간섭 없이 시칠리아 주교들을 임명하고 교황 사절이 시칠리아에 방문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 포기일 뿐이었고, 시칠리아 왕들은 이후로도 시칠리아 주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때 교황 사절은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황후를 인질로 삼음으로써 하인리히 6세와의 정치 대결에 이용하려 했다. 탕크레드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은밀히 파견한 독일 기사단이 로마로 이송중이던 쿠스탄차를 빼돌려 독일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탕크레드는 이제 하인리히 6세가 대대적인 침공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마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꺼린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접근했다. 양자는 협상 끝에 탕크레드의 장남 루지에로 3세와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193년, 탕크레드는 후계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루지에로 3세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해 12월 24일, 루지에로 3세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남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은 탕크레드는 몸져누웠고, 오랜 투병 끝에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사후 차남 '''[[굴리에모 3세]]'''가 집권했고 시빌라 왕비가 [[섭정]]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가했고, 귀족들이 대거 하인리히 6세 편을 들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팔레르모에 순조롭게 입성한 뒤 1194년 12월 25일에 시칠리아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고, 굴리에모 3세와 시빌라는 폐위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를 찬탈자로 낙인찍고 그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했다. 시빌라와 딸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굴리에모 3세는 어찌 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으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